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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살아내기, 현재를 애도하기

시우
@siu_tldn ¹⁾
1. 기억하기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악몽의 해저기지 : 바다에 갇힌 사람들]이었다. 제목을 보면서 나는 잠시 굳어 있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설명은 [북태평양 해저기지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테러를 파헤치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처참했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진실을 마주한다]였다.”²⁾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이하 ‘어바등’)에서 박무현은 모든 회차를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무현에게는 다른 이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관계, 도움과 폭력, 죽음의 기억이 있다. 무현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뇌가 생존을 위해 기억의 바다에 열심히 묻어버”린다고 말하지만³⁾, “바다에 버린 것들은 다시 돌아온다.”⁴⁾ 뇌는 기억을 잊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바다에 묻어버리고, 기억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영향을 끼치거나 의식으로 떠올라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성한다. 우리는 “기억의 무거운 짐을 끌고 다녀야”⁵⁾ 하며, 기억에 얽매인 채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기억에 ‘갇혀’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현을 비롯한 해저기지 재난 생존자들이 그날의 기억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된다고 해서 그들이 “바다에 갇힌 사람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픈 기억, 고통스러운 과거를 쉽게 잊어버릴 수 없을 때, “과거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 지금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 속에 과거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⁶⁾ 생존자들은 그날의 바다, 그날의 기억에 갇혀있다기보다는 그 과거와 함께, 그 과정에서 몸에 새겨진 상처와 함께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기억, 즉 놓아버릴 수 없는 아프고 고통스러운 과거를 기억하고 그 과정에서 겪은 상실을 애도하는 행위에 대해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때 아프고 고통스러운 과거는 무한교의 테러와 해저기지 붕괴라는 재난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은자디 카누나 투마나코 오란가에게 흑인/원주민의 역사는 지워지지 않을 상처이다. 이처럼 작중 서로 다른 상실과 고통의 시간을 살아내는 이들의 기억을, 애도를 따라가 보려 한다.
    2장에서는 취약한 위치에 놓인 이들, 상실을 상실로 인정받지 못하고 애도하지/받지 못하는 이들의 상실과 애도를 살핀다. 작중 흑인과 원주민의 상실과 애도는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 이들이 상실을 기억하고 상실한 것에 애착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이러한 관찰을 통해서 상실을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이어서 3장에서는 무한교의 사례를 통해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 상실을 애도한다는 것의 윤리를 검토해 본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왜 과거를 기억하고, 상실을 애도하는가? 이 행위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인가? 즉, 이 행위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해 보며 글을 맺고자 한다.
 

2. “우리는 우리가 뭘 잃었는지도 몰라”⁷⁾ ― 불행한 기억, 우울한 애착
 
    무언가를 상실했다는(喪失, missing) 것은 잃어버렸다는 것(失, missing), 더는 없어졌다는 것, 돌이킬 수도 되찾을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없는 것을 기억한다는 뜻이기도 하다.⁸⁾ 그러나 우리는 ‘없음’ 자체를 생각할 수는 없다. 없음은 ‘무엇-없음’으로, 즉 있어야 하지만 없는 ‘무엇’에 초점을 두는 방식으로 사유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⁹⁾ 따라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상실 자체라기보다는 상실이라는 느낌, 상실한 것을 향한 욕망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상실했는지 언제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¹⁰⁾ “우리가 상실한 것들은 의식에서 철수한다. 상실의 느낌이 무의식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상실했음을 느낄 때조차 무엇을 상실했는지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이다.”¹¹⁾ “그래서 상실을 겪을 때 우리는 불가사의한 그 무엇과 대면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언가가 상실 속에 숨어 있고, 무언가가 상실 내부의 으슥한 구석에서 상실된다.”¹²⁾  따라서 우리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 더는 없는 것, 상실 속에서 상실된 것을 붙잡은 채 기억하려 애쓰고, 욕망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를 상실의 대상을 놓아주는 건강한 ‘애도’에 실패한, 병적인 ‘우울증’의 상태라고 말한다.¹³⁾ 이미 죽은 것, 상실한 것을 놓아주지 못한 채 계속해서 욕망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무한교를 떠오르게 하는 듯하다. 그중 하나는 바로 은자디 카누이다.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40대쯤 되어 보이는 흑인 남성’으로 묘사되고 있는 카누는 무한교 신도로서 무한교에 10억 원 정도의 현금과 400억 원 이상의, 2미터 안 되는 크기의 보석을 헌금했다. 카누가 되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약 600년 전이다. 흑인이 세계 최초로 팔리기 시작한 1441년, 그 이전으로 돌아가 “어느 나라의 식민지도 되지 않았던 시절의 아프리카와 유괴 당한 적 없는 내 선조를 보고 싶”은 것이다.¹⁴⁾
    그리고 이 말 바로 앞에 붙은 말은 다름 아닌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뭘 잃었는지도 몰라.” 600여 년의 시간에 걸쳐 계속해서 상실되어 온 흑인의 역사에서 카누는 상실한 흑인의 것들을 단 한 번도 소유한 적이 없었다. 카누에게 상실한 것은 자기 이전에 이미 상실된 것, 가져 본 적이 없으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 그러나 결코 놓을 수는 없는 그 무언가이다. 카누의 상실은 지금도 카누의 피부에 달라붙어 있다. 검은 피부를 향하는 시선, 그 피부에 달라붙는 증오의 정동과 증오를 유발하는 원인으로 지목되는 그 몸이 증오의 대상으로 (재)생산되며 피부에 상처를 새긴다. 흑인의 역사, 상실의 역사를 담은 상처를 말이다.
    카누의 말 뒤에 이어지는 서술은 다음과 같다. “샘이 얼떨떨하다는 듯이 카누를 바라봤다. 그리곤 입을 열었으나, 뭐라 말하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건 너무…….” 샘이 인상을 쓴 채로 말없이 가만히 있더니 얼마 후에 카누의 어깨를 커다란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¹⁵⁾ 카누의 말은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백인으로서 샘은 할 말을 잃는다. 카누의 말은 백인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수치심 때문에 카누는 불행의 원인, 백인을 수치스럽게 하는 원인으로 여겨진다. 샘은 카누의 말에, 그리고 이어진 벤자민의 ‘인종차별적’ 말에 백인을 대표해 부끄러워하고, 이 수치심을 드러냄으로써 그 수치스러운 일, 즉 백인이 가해 온 인종차별의 역사를 적당히 넘기고 ‘인종차별적이지 않은’ 백인성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수치심은 미안함을 안타까움으로 바꾸고, 책임을 가리며, 불행의 역사를 상대의 몫으로 넘긴다.¹⁶⁾ 샘은 카누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으로 안타까움과 화해의 제스처를 건넨다. 이 제스처는 하나의 판타지를 제공한다. “우리가 인종차별에 대해 잊을 수 있다는 판타지, 우리가 그런 상처의 역사를 뒤로할 수 있다는 판타지 말이다.”¹⁷⁾
    우리는 카누의 사례를 투마나코 오란가와 함께 살펴볼 수도 있다. 마오리족 언어로 된 이름을 가진 투마나코는 마오리의 언어를, 마오리의 신화를 기억한다.¹⁸⁾ ‘삶(oranga)을 바란다(tūmanako)’는 뜻으로 추정되는 투마나코의 이름은 해저기지 재난 상황에서 생존을 원하는 이름으로도 읽히지만, 동시에 상실된 마오리의 삶(oranga), 마오리의 역사를 욕망하는(tūmanako) 마오리 생존자/잔재(oranga)의 이름으로도 읽을 수 있다.¹⁹⁾ 투마나코의 이름, 투마나코의 피부에는 마오리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뉴질랜드의 어떤 문제도 죄다 ‘이민자’의 탓이 된다는 투마나코의 말은 마오리가 불행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방식을 보여 준다.²⁰⁾ 뉴질랜드의 땅은 유럽인의 것으로 강탈되어 원주민은 ‘이민자’로 내몰리고, ‘이민자’들은 ‘(백인)국가’에 문제를 일으키고 백인의 몫을 ‘훔쳐 가고’ 백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따라서 국가와 원주민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라 인종차별을 기억하는 원주민이 된다. 원주민들이 인종차별의 역사를 “잊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삶을 지배하는 인종차별주의의 힘을 보존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과제는 “그것을 잊는 것”이 된다. 마치 당신이 그것을 잊으면 그것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²¹⁾
    그러나 “어떤 역사들은 뒤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불행의 역사, “행복이라는 기호 아래 지워진 제국의 역사” 속에서 카누와 투마나코의 불행한 기억은 이름에/몸에/피부에 새겨진 채 지금도 계속된다. “이런 역사들은 끈질기게 지속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역사의 지속성과 함께하는 우리의 불행을 끈질기게 말해야 한다.”²²⁾ 이는 상처를 정체성으로 삼자는, 흑인과 원주민을 오로지 상처 입은 존재로만 여기자는 제안이 아니다. 상처를 정체성으로 삼는 일은 상처를 현재의 상태로만 환원함으로써 상처가 형성된 역사로부터 상처를 단절시킨다. 그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애초에 몸의 표면이 어떻게 상처를 입게 됐는지를 기억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 이는 과거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을 놓지 않음으로써 가능해진다.”²³⁾ 따라서 상실한 것을 놓아주지 못하는 것, 상실의 (불행한) 기억을 붙잡는 (우울한) 애착은 상실의 역사를 인정받기 위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사과를 받기 위한, 상처를 회복하는 화해가 아니라 상처를 기억하는 화해를 위한 투쟁이자, 상실로 인정받지 못하고 애도받지도 못한 흑인-원주민의 상실된 삶을 애도하는 투쟁이 된다.
 

3. “저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잃는 게 아주 많더라도 말입니다.”²⁴⁾ ― 상처를 기억하는 삶
 
    2장에서 다룬 카누와 투마나코의 상실과 애도는 개인적인 것인 동시에 흑인-원주민 공동체적인 것이기도 하다. 흑인의 역사를, 원주민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말, 이들의 상실의 역사를 기억하고 애도해야 한다는 말은 어쩌면 익숙한 말이기도 하다. 그것이 윤리적 요청이든,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든 말이다. 어쨌든 이러한 윤리적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들에게 쉽게 ‘잊으라’고, 그만 잊고 행복해지라고 선뜻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비슷한 말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쉽게 하곤 한다. 우리는 친구가 나쁜 일을 겪어 힘들어할 때, 친구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애쓰려 한다. 이때 우리는 친구가 그 나쁜 일을 ‘잊을’ 수 있도록, 그 일에서 그만 벗어나 즐길 수 있도록 한다. 그 일을 연상시킬 만한 것은 언급하지 않으려 들며, 혹시 말을 잘못 꺼내면 분위기는 가라앉는다. 이때 불행의 원인은 어떤 사건이나 그 사건이 발생한 사회역사적 맥락이 아니라, 그 사건을 자꾸 기억하는/상기시키는 행위로 전환된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말이 다시 떠오르는 듯하다. 불행한 기억에 집착하는 우울증자의 형상이 말이다.
    취약한 집단적 정체성들의 상실에 대해서 ‘잊으라’고 말하는 것이 윤리적 요청과 어긋난다면, 개인적(이라고 여겨지는) 상실에 대해서 ‘잊으라’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가? 물론 우리가 친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애쓰는 일을 흑인-원주민의 상실의 역사를 지우는 것과 동일시하거나, 그만큼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간극은 도대체 어디서 발생하는가? 다른 무한교 신도들의 상실, 가령 “팔찌 주인을 찾아서 내게 다시 돌려줘. 인신매매일 거야. 10년 전에 갑자기 없어졌어.” 라고 말한 하오란의 상실은 어떤가?²⁵⁾ 하오란의 상실에 대해서 우리는 그만 잊으라고, 과거를 그만 놓아주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오란의 상실은 카누의 상실과 달라서 그만 놓아주어야 하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오란의 상실과 카누의 상실은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상실은 잊어도 되는 것, 잊어야 하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상실을 기억하는 것이 투쟁이 되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은 누군가를 살게 하는 하나의 방식이자 죽은 이들을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²⁶⁾
    우리는 하오란의 상실을 개인적인 상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상실도 ‘온전히 개인적인 상실’이거나 ‘온전히 집단적인 상실’일 수는 없다. 카누와 투마나코의 상실이 공동체적 역사 속에 위치함과 동시에 개인적인 상실이듯이,²⁷⁾ 하오란의 상실은 개인적인 동시에 그저 개인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상실은 ‘나’ 또는 ‘우리’가 ‘무엇을’ 상실하는 것, 즉 최소 둘 이상의 존재를 전제하기에 이미 사회적인 것, 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상실이 상실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상실한 주체 또는 상실된 그 무엇이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이자, 그 관계가 관계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엇을 상실하든(원주민이 땅과 언어를 빼앗기든), 무엇이 상실되든(흑인의 목숨이 빼앗기든), 이들은 상실할 수 있는 주체이거나 상실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상실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상실할/될 수 있고 애도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으로 인정받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애도받지 못하는 이들은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²⁸⁾ 너무나 많은 상황에서 흑인과 원주민들을 비롯한 취약한 이들이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듯이 말이다.
    만약 애도받지 못하는 것이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된다면, 애도는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오란의 상실을 애도하는 일은 하오란이 상실한 그 누군가를 인간으로 남게 하는 일, 죽은 이를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이 된다. 만약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애도가 상실한 대상을 놓아주는 일, 상실한 대상이 상실되었음을 인정하는 일이라면, 애도야말로 상실한 대상을 상실시키는 일이 될 수 있다. 상실을 인정하는 일이 대상을 상실하게 하고, 죽음을 인정하는 일이 대상을 (다시) 죽이는 일이 되는 것이다.²⁹⁾ 그렇다면 하오란에게 상실을 이제 그만 ‘잊으라’고 말하는 일은 하오란이 상실한 그 누군가를 이제 그만 (다시) ‘죽이라’는 뜻이 될 수 있다.
또한 하오란이 상실한 이를 죽이는 일은 하오란을 죽이는 일이 되기도 한다. 버틀러가 말하듯이
 
    “여기에 어떤 “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여 저기에 있는 “너”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너”에 대한 애착이 “나”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일부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조건 하에서 내가 너를 잃는다면, 나는 상실에 대해 애도할 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이해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너 없이 나는 누구로 ‘존재’하는가? 우리를 구성하는 이런 유대관계 중 일부를 잃으면,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어떤 층위에서는 “너”를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나” 역시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할 따름이다. 다른 층위에서, 어쩌면 내가 잃은 너 “안의” 그것, 마땅히 지칭할 어휘가 없는 그것은, 나나 너 중 한 사람만으로 배타적으로 구성되지 않았지만 너와 나라는 항을 차별화하고 관계 짓는 ‘유대관계’로 이해해야 할 관계성이다.”³⁰⁾
 
    상실이 관계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관계 속에서 누군가 상실되었다는 뜻이다. 이 상실은 필연적으로 관계의 상실, 붕괴를 유발한다. 그렇다면 이를 상실한 ‘나’ 역시 온전할 수는 없다. ‘너’를 상실함으로써 나 역시 상실되고, 변화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상실했다고 해서 상대의 흔적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³¹⁾ 너의 상실로 인해 변화한 나에게 너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애도란 잊는 것이 될 수 없다. “애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변하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 아마도 애도는 미리 그 변화의 본격적인 결과를 알 길이 없는데도 그런 변화를 겪겠다고 (어쩌면 변화를 ‘감수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동의하는 것과 상관이 있다.”³²⁾ “상실로 인해 슬퍼한다는 것은 상대의 죽음 한가운데서 상대의 흔적이 살아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³³⁾
그렇다면 하오란에게 무현이 건넨 말은 과거를 잊으라는 말이 아니다.
 
    “제 구원 방법은 그냥 하루를 사는 겁니다. 날마다 양치하고 치실 하면 더 좋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야기 좀 들어주고, 배고프다고 하면 밥 좀 먹이고, 별거 아닌 말로 격려해주고. 제가 아는 방법은 이게 끝입니다. 제가 아는 다른 구원 방법은 없어요.”³⁴⁾
 
    이 말은 잊으라는 말이 아니라, 과거와 함께 살자는 말이 된다. 상실한 상대의 죽음 속에서 나 역시 일부가 상실된 채로, 상실 속에서 살자는 말이다. 과거는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다. 이 삶, 현재의 관계 속에 더 이상 상대가 아닌 상대의 흔적이 어렴풋이 함께한다. 우리에게 흔적으로 남은 그 상대는 더 이상 그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상대를 불완전한 채로, 타자를 내가 아닌 타자인 채로 남겨 두려는 시도, 자신과 타자가 혼종적으로 서로 오염되어 관계와 상실 속에서 변화하며 타자와 함께 하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이것이 죽음과 함께 산다는 것, 죽은 이들이 살아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이는 과거의 상실, 상처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윤리적 요청이 된다.
    그러므로 ‘과거로 돌아간다’는 무한교의 방식이 아니라 잃는 게 아주 많을지라도 돌아가지 않는 무현의 방식이 윤리적 애도가 된다. 상실한 것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프로이트가 그린 것처럼 우울하고 아픈 삶일지도 모른다. 어떤 상실은 정말로 거대해서 우리를 거의 완전히 파괴하고, 살 만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무한교에 기대게 하고, 과거로 돌아가 상실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싶게 하고, 아예 자기 자신을 통째로 상실하고 싶게 만들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불가역적인 파괴이자 변화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런 파괴와 상처 속에서 살 만하지 않은 삶과 함께 사는 것이기도 하다. 버틀러가 말하듯이,
 
    “설령 망가졌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살 만한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네, 전혀 그렇지 않지요. […] 살 만하지 않은 삶은 그것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채로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살거나 동행합니다. 삶이 끝나야만 살 만하지 않은 삶도 끝이 납니다. 여러분에게 남은 삶이 무엇이든 그것은 살 만하지 않은 삶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 삶의 동반자로서, 혹은 그 삶을 구성하는 잔해로서, 어쩌면 그 삶과 떼어낼 수 없는 견디기 힘든 동행으로서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것이 반드시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살 만하지 않은 삶과 더불어, 살 만하지 않은 삶 속에, 살 만하지 않은 삶을 계속 살아간다는 것 말입니다.”³⁵⁾
 
    재난 이후 무현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고 해서 무현의 삶이 살 만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처의 기억, 상실의 과거와 함께 산다는 것은 아프다. 더구나 다른 이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들, 모든 회차에서의 상실을 기억하고 있는 무현에게 그때 상실했던 이들은 지금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실된 이들이 된다. 그때의 상대와 지금 살아 있는 상대는 무현과 다른 관계로 얽혀서 무현의 몸에 흔적으로 새겨져 있다. 재난이 옳은 것이 아니었을지라도, 그 재난으로 인한 상실은 여전히 삶과 함께한다. 삶의 흔적에 옳은 것만이 남지는 않는다. 부당한 것조차 삶으로 구성된다. 상실을 없던 일로 한다는 것은 어떤 관계, 어떤 삶을 없던 일로 한다는 것이 된다. 설령 그것이 살 만하지 않은 삶일지라도, 그것은 삶으로서 기억되고 애도되어야 하는 것이다. 무현이 다른 이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상실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애도하듯이 말이다.
 

참고문헌
 
김초엽, 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루인. “죽음을 가로지르기: 트랜스젠더퀴어, 범주, 그리고 자기 서사”.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여이연, 2018.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자책]. 전 17권. 문피아, 2023-2024 [검색 2025년 09월 26일]); 인터넷 주소: https://ridibooks.com/books/425345868.
Ahmed, Sara. 행복의 약속: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성정혜, 이경란 옮김. 후마니타스, 2021.
Ahmed, Sara.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Butler, Judith. “폭력, 애도, 정치”. 위태로운 삶: 애도의 힘과 폭력.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Butler, Judith & Worms, Frederic.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4.
Freud, Sigmund. “슬픔과 우울증”.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 옮김. 신판. 열린책들, 2020.
Te Aka Māori Dictionary. 검색 2025년 09월 26일. https://maoridictionary.co.nz/.

1) 저자는 이 글의 내용에 관한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며, 이 글에는 잘못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글과 관련한 모든 문의 등은 아래 메일로 부탁드립니다. 메일 주소: koeisskro3088@gmail.com
2)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자책], 제17권 (문피아, 2024 [검색 2025년 09월 26일]); 인터넷 주소: https://ridibooks.com/books/425345868.
3)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자책], 제16권 (문피아, 2024 [검색 2025년 09월 26일]); 인터넷 주소: https://ridibooks.com/books/425345868.
4)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자책], 제15권 (문피아, 2024 [검색 2025년 09월 26일]); 인터넷 주소: https://ridibooks.com/books/425345868.
5)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286쪽.
6) Sara Ahmed,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85쪽.
7)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자책], 제5권 (문피아, 2023 [검색 2025년 09월 26일]); 인터넷 주소: https://ridibooks.com/books/425345868.
8) Sara Ahmed, 행복의 약속: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성정혜, 이경란 옮김 (후마니타스, 2021), 254쪽.
9) 김초엽, 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51쪽.
10) Sigmund Freud, “슬픔과 우울증”,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 옮김, 신판 (열린책들, 2020).
11) Sara Ahmed, 행복의 약속, 254쪽.
12) Judith Butler, “폭력, 애도, 정치”, 위태로운 삶: 애도의 힘과 폭력,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49쪽.
13) Sigmund Freud, “슬픔과 우울증”,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14)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자책], 제5권.
15)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자책], 제5권.
16) Sara Ahmed, 감정의 문화정치, 223-263쪽.
17) Sara Ahmed, 행복의 약속, 269쪽.
18)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자책], 제5권;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자책], 제7권 (문피아, 2023 [검색 2025년 09월 26일]); 인터넷  주소: https://ridibooks.com/books/425345868.
19) 마오리어 사전인 ‘Te Aka Māori Dictionary’를 참고했다. 다만 투마나코의 이름은 어디까지나 추정이므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검색 2025년 09월 26일] https://maoridictionary.co.nz/. 한편 ‘oranga’가 단순한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투마나코가 바라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살 만한 삶, 마오리로서-투마나코 오란가로서 살 만한 땅과 문화, 공동체, 삶일 수도 있을 것이다.
20)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자책], 제6권 (문피아, 2023 [검색 2025년 09월 26일]); 인터넷 주소: https://ridibooks.com/books/425345868.
21) Sara Ahmed, 행복의 약속, 260쪽.
22) Sara Ahmed, 행복의 약속, 290쪽.
23) Sara Ahmed, 감정의 문화정치, 85쪽.
24)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자책], 제15권.
25)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자책], 제14권 (문피아, 2024 [검색 2025년 09월 26일]); 인터넷 주소: https://ridibooks.com/books/425345868.
26)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Sara Ahmed, 행복의 약속, 342-345쪽.
27) 카누와 투마나코의 상실을 그저 흑인의, 원주민의 상실로 환원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범주를 존재 자체, 삶 자체로 이해했을 때 우리는 존재를 삭제하고 범주만 남긴다.” 루인, “죽음을 가로지르기: 트랜스젠더퀴어, 범주, 그리고 자기 서사”,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여이연, 2018), 175쪽.
28)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Judith Butler, “폭력, 애도, 정치”, 위태로운 삶.
29) Sara Ahmed, 행복의 약속, 252쪽.
30) Judith Butler, “폭력, 애도, 정치”, 위태로운 삶, 50쪽.
31) Sara Ahmed, 감정의 문화정치, 345쪽.
32) Judith Butler, “폭력, 애도, 정치”, 위태로운 삶, 48쪽.
33) Sara Ahmed, 감정의 문화정치, 345쪽.
34) 연산호,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자책], 제14권.
35) Judith Butler, Frederic Worms,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4), 52-53쪽.